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조용하게 스며들듯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이번 ‘괴물’은 시작부터 뭔가 다르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익숙한 작법을 내려놓고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와 손잡았다는 얘기를 듣고, 솔직히 처음엔 살짝 의심했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조합은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 정보 요약
•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각본: 사카모토 유지
• 장르: 드라마 / 성장 / 감정 드라마
• 주제: 오해, 관계, 타인의 시선,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 상영 시간: 약 2시간 6분
줄거리
영화는 한 아이가 호숫가에서 고요히 불길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멀리 고층 건물에 불이 나고 있지만,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볼 뿐입니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괴물'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이 아이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만이 남죠. 이 프롤로그는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될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괴물은 누구인가?”
본편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보여줍니다.
첫 번째 시점은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입니다. 성실하고 자애로운 엄마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아이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건넨 말들이 아이에게는 무거운 부담이 되고, 진심 어린 조언조차도 때로는 상처가 됩니다. 사오리는 미나토가 겪고 있는 진짜 고통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무심히 지나쳐버리고 맙니다.
두 번째 시점은 담임 선생님인 호리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아끼고 책임감도 강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미나토와 요리를 오해하고, 무심코 던진 말이나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됩니다. 특히 호리는 자신도 편견 속에서 자라온 인물이면서, 정작 자신이 그 편견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미나토의 시점입니다. 그제야 관객은 요리와 미나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오해가 쌓였는지, 진짜 괴물은 누구였는지를 제대로 마주하게 됩니다. 가장 중심에 있었지만 앞선 시점들에서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던 요리의 존재와 마음이,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거죠.
이처럼 영화는 세 번의 반복을 통해, 오해가 쌓이고 진실이 가려지는 과정을 차근히 보여주며, 마지막엔 두 아이의 감정과 관계를 가장 맑은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세상을 향한 오해와 단절, 그리고 그 안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마음이 차례로 펼쳐지다가, 마침내 그들을 둘러싼 모든 오해가 걷히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결말부에서 거센 폭풍우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뒤, 진흙투성이가 된 두 아이는 햇살이 쏟아지는 바깥으로 함께 뛰어나옵니다. 요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태어난 걸까?”
미나토는 말합니다. “아니, 이전하고 똑같은 거 같아.”
그때 요리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합니다. “아, 정말이야. 다행이다.”
이 마지막 한마디는 요리가 이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자, 관객이 영화 전체를 통해 함께 도달하게 된 감정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연출
고레에다 감독 영화 중 이렇게 구조적으로 독특한 작품은 처음 봤어요. <라쇼몽>처럼 시점을 나누긴 했지만, 여기엔 명확한 정답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진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잘못된 시선을 거쳐야 진짜를 볼 수 있다'는 구조죠.
무엇보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볼 때마다 감정이 달라진다는 게 정말 신기했어요. 그게 바로 이 영화가 가진 힘인 것 같아요.
주제
처음에는 누구나 선생님이 가해자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는 엄마의 말들이 가시처럼 박히고요. 그런데 끝까지 가보면, 사실 아이 둘이 세상의 오해와 편견 속에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게 돼요.
더구나 무엇보다 요리가 마지막에 하는 말, “아, 정말이야. 다행이다”는 대사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더라고요.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낀 그 순간, 요리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아쉬웠던 점
굳이 꼽자면 초반 1부는 좀 지루할 수도 있어요. 워낙 말이 적고 여백이 많은 스타일이라서 집중력이 잠깐 흐트러질 수도 있는데, 그걸 참고 나면 그다음이 훨씬 몰입됩니다. 원래 다시 보게 되는 장면들이 훨씬 크게 다가오거든요.
총평
‘괴물’은 잔잔한 영화지만, 끝나고 나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영화예요. 잔상이 깊어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두 아이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웃으며 뛰어다니는 그 마지막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맺혀요.
그렇게 조용하지만 강하게, 아이들의 진심이 전해지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어요.